12.12 당시 김오랑과 박종규의 엇갈린 운명

12.12 당시 김오랑과 박종규의 엇갈린 운명


​  12.12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휘하 부대에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특전사령부에는 이미 하나회 멤버들이 정병주 소장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두환의 명령에 움직이는 장교들이 있었다. 특전사 제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이 바로 그 사람이다. 최세창은 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사령관실에 도착한 반란군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끝까지 지키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죽이고 사령관을 끌어내 군용 지프차로 압송했다.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사령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김오랑 육사에 진학

  김오랑 소령은 1944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김해농고를 수석 졸업한 후 육사에 진학했다. 육사 졸업 후 소위에 임관하여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에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으며, 부산대 간호학과에 재학중인 백영옥과 1972년 결혼한다.

특전사에 배속

  1974년 특전사로 배속되고 1979년 특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는 김오랑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육사동기생들도 김오랑 소령을 예의 바르고 똑똑한 군인이며, 인맥 관리보다 임무 완수를 다했던 군인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12.12군사 반란으로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은 최세창 공수여단장의 15대대장이었던 박종규 중령이었다.


친한 사이였던 김오랑과 박종규

  김오랑과 박종규는 육사 선후배로 서로 친한 관계였다. 특전사 장교 관사에 살때에는 서로 위아래층에 살며 부부모임도 자주했다고 한다. 그렇게 각별한 사이였는데 김오랑 소령이 희생되었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정병주 사령관은 1987년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12.12 군사반란을 증언했는데 1989년 경기 양주 송추유원지 근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정병주 사령관의 아들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서문에 <고 김오랑 소령을 추모하여>라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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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은 김오랑 부인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씨는 12.12 당일 김오랑 소령으로부터 <오늘 저녁도 못들어갈 것 같아. 미안해>라고 전화왔다고 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총소리가 나서 다음 날에 남편 김오랑 소령의 안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고 한다. 나중에 남편을 잃은 충격에 시력을 완전히 잃고 연금에 의지하며 살았다. 그런데 1991년 백영옥 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자비원 마당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발표했지만 유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실족사로 사인을 수정했다고 한다. 남편을 허망하게 잃고 한많은 인생을 살다가 사인도 불분명하게 돌아가신 것이다.


김오랑 중령 명예회복 운동

  한편 12.12 당시 반란 진압군이었던 중령 김광해 씨와 특전사 출신 김준철씨가 김오랑 추모사업회에서 김오랑 명예회복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지난 2009년 박종규 중령 등에게 김오랑 소령을 사살한 책임에 대한 사죄를 요구했다. 박종규는 <12·12의 과실을 누린 적은 없고, 항암에 지쳐 누워 있으니 이제 모두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완전한 패배자입니다.>라고 편지로 답했다. 그는 2010년 12월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희생이다. 참군인의 모습을 보여 준 김오랑 중령(부인 백영옥 씨의 청원과 당시 야당인 평민당의 가세로 중령으로 1계급 특진되었음.)명복을 빈다. 아울러 김오랑 중령의 군인 정신을 본받을 수 있도록 여러 방안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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